얼마 후에 문을 두드려 다시 내다보니 아까 왔던 그 사람들이었다. 문을 활짝 열고 문을 등에 붙이고 선 채로 그들에게 나아갔다. 교회가 Hollywood로 이사하기 전인 Vermont길 사거리여서 교회 앞에는 사람도 차들도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내게 전기검사를 하러 왔으니 지하실로 안내를 하라고 지시를 했다.“Basement? Our church has not basement. By the way, why you did not report first?(지하실? 우리 교회에는 지하실이 없어. 그런데 왜 먼저 통보를 하지
지뢰밭. 1975년 봄쯤이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1974년 11월에 중풍으로 누워 계셨던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까. 그때, 1974년 11월 말경 시이모네 집 수돗가에서 혼자 김장배추를 절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 김치를 제대로 담글 수가 있을까?”라고 되뇌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외 며느리인 나는 시이모네 김장배추 절이던 일을 그만두고 곧바로 집으로 달려갔다.그때도 혼자서 손님과 식구들의 식사를 챙기느라 잠도 자지 못한 채 일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시모와 시누이들이 방 안에 꼼짝
2000년 3월 29일 Tacoma, Washington State 순복음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그해 8월에 미국 자체적으로 성경통독 66권 3박 4일 집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제 1차 집회는 본인이 행정 비서로 시무하고 있던 LA 나성 순복음교회에서 열렸고 제2차는 다음 해 1월에 Riverside에 있는 나성 순복음국제 금식기도원에서, 제3차는 다시 교회, 제4차는 다시 기도원에서 했다.그렇게 계속해서 성경통독 66권 3박 4일 집회를 하게 될 줄로 생각을 했지만, 김 성수목사님께서 한국으로 들어가시면서 중단하게 되었다. 원
제1차 성경통독을 인도할 때는 거의 서 있곤 했다. 그 이유는, 혹시라도 훼방할 수 있는 사탄의 세력을 제어하기 위한 내 나름의 결단이었다. 한국같이 매번 하던 일도 아닌 데다가 미국에서 자체적으로 시작한 첫 번째 집회이고 또 성전 자체가 이단교회가 사용하던 건물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나중에 보니, 다리에 울긋불긋 피가 맺힌 것이 보였다. 이 세상은 공중권세 잡은 마귀와의 전쟁, 절대로 져선 안 되는 싸움이다.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는 모두가 일어서서 읽기로 했다. 21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새 예루살렘을 바라본다. 22장에서
서울 잠실의 화광 침례교회에서 실시한 3박 4일 성경통독 66권 특수훈련은 특별히 구국 금식기도 집회로 하게 되었다. 진행 중 2일 차에 내가 거의 기절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자원봉사를 하시던 권사님들에 의해 성전 옆 작은 장소로 옮겨졌다. 한 권사님이 미숫가루를 타서 내 입에 흘려 넣어 주셨고 그 집회는 그런 상황에서도 진행, 완료되었다.적어도 앞에서 인도하는 통독 강사들만큼은 금식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참석자들이 금식하는 마당에 인도자들이라고 음식을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원래 나는 힘이 될 만한 음
주스(Juice) 금식기도는 미국 성도들 방식이다. 성경통독집회뿐만이 아니라 교회 행정을 담당해야 하니 물만 마시고 하는 금식을 할 처지는 아니어서 주스 금식을 하게 되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빈속에 마시는 주스가 얼마나 지독하게 단지. 마치 독약 같아서 물을 반이나 타서 마셔야 했지만, 당분의 위력은 막강했다. 조금 허전해서 그렇지 넉넉히 견딜 수가 있었다. 물만 마시고 하는 금식하고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하루는 김정옥 사모님이 뒤에서 걸어오시다가 “목사님, 뒤에서 보니까 목까지 가늘어졌어요”라고 하셨다. 그렇다. 살은 몸의
다음 해인가. 나는 한 사람의 성경통독 강사로서 참여하게 되었다. 성경통독 인도자들이 거의 교회 담임 목사들이기도 해서 미국 집회 시에는 박종면 목사님만 오게 된다.그래서 샌디에이고 갈보리장로교회(그 당시 담임 한기홍 목사) 성경통독 집회(2회)와 라성빌라델비아교회의 3박 4일 성경통독 집회를 돕게 되었고, 한국집회에도 초청을 받아 함께 하기도 했다.한번은 한국 집회에 나가서 3박 4일 집회를 세 번이나 연속으로 했다. 그때 성대가 완전히 나가서 말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침 살아있는 벌을 가지고 다니시던 한 여자 전도사님이 내
물설고 낯 설은 이민 초기, 성경을 늘 가슴에 안고 다녔다. 아마도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서 성경을 빼앗아 갔다면, 나는 거품이 되어 스러졌을 것이다. 한국의 옛날 집에는 부엌에서 안방으로 작은 미닫이문이 있어서 그리로 갓 푼 밥과 국을 들여놓곤 했는데, 나도 내 가슴에 그 미닫이문을 하나 만들어서 아예 가슴에 성경을 집어넣고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직장에서도 성경은 항상 내 옆에 있었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의 위로며 소망이었으니까.그러나, 막상 성경은 열리질 않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이 읽히지 않았다는
마음에 가득한 미움이라는 정체가 원통하고 억울해서 이를 갈면서 “000과 000을 사랑합니다!” 라고 울부짖는 순간, 몸이 의자에서 굴러떨어져서 성가대실 바닥을 두드리며 몸부림을 치게 되었다. “말도 안 돼, 내가 어떻게 그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가 있어? 억울해, 분하다고.”그러나 계속해서 “000과 000을 사랑합니다!”라고 악을 쓰고 있는 사이에 그런대로 익숙해졌는지 더 이를 갈지는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 그나마 미움의 독소가 빠져나가서인지 온몸이 굳어 버릴 것만 같았던 증상이 가라앉았다. “빛 가운데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흑암의 세력은 당장에 이 성전에서 그물을 거두고 떠나갈지어다, 떠나갈지어다!”마치 마귀가 내 앞에 서 있기라도 한 듯, 나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성도들을 덮친 그 어둠의 세력을 대적했다. 얼마나 그렇게 했을까? 마침내 성도들을 덮치고 있던 시커멓고 거대한 그물망이 스르르 벗겨지더니 애초에 들어왔던 왼쪽 성전 문밖으로 슬금슬금 사라졌다.내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악을 써 대도 누구 하나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지치고 곤한 영혼들이 그렇게 무방비 상태인 채로 그 그물에 사로잡혀 갔
콜로라도의 겨울은 춥다. 눈도 많이 온다. 그 한겨울에 베이비시터를 하는 집에서 나와보니 차가 꽁꽁 얼어 있었다. 시동을 걸어서 겨우겨우 길로 나아 오기는 했는데, 도대체 앞이 보여야 운전을 하지. 앞창에 더운 바람을 날리고 물을 쏘아 보아도 워낙에 기온이 낮다 보니 잠시 녹는 듯하다가 이내 다시 얼어 버린다.자동차 앞창은 그야말로 성애로 뒤덮여 백태 낀 눈동자 같다. 문제는 앞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차들이 있다. 그들의 차들도 형편이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내내 달리던 차와 방금 집 안의 차고에서 나온 차들
그가 내 인생에서 뿌리 뽑혀 나가고 20일이 지난 12월 1일,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길이 있고 신호등이 있고 차가 있고 운전 면허증이 있는데, 왜 운전을 하면 안 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30여 년을 살면서 하도 짓이겨져서, 나 스스로 ‘나는 운전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까지도 “엄마는 다 잘하지만 운전은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을 짓누르고 있던 바윗덩어리가 기적같이 떨어져 나가자 나는 날개를 퍼덕이게 되었고, 12월 1일
1990년 12월 31일 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가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우리 교회 기도원인 리버사이드 국제 금식 기도원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1991년 1월 1일 신년 축복 성회가 시작되었다. 찬양과 설교 말씀이 끝나고 기도를 올리는 시간, 불현듯 그로 하여금 담배를 끊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수십 년을 담배를 피워왔다. 갓난아기가 있는 방에서도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사람이다. 운전하면서도 담배를 피웠는데, 열린 창문도 꼭꼭 닫아 놓고 차 안을 곰의 굴처럼 만드는 사람이다. 무엇을 하든지 자기가 하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이민 초기, 영어도 기술도 서투른 패턴메이커로 일을 할 때였다. 지시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을 때 그 자리에서 모르는 단어를 물어서 사전을 찾으며 돌파해 나갔다. 당시, 내 테이블 오른쪽 모퉁이에는 성경과 나무 십자가, 영/한 사전과 영어/스패니시 사전이 비상 대기 중이었다. 그 회사는 프랑스계 유대인이 운영하는 회사로서 운영자 몇 명을 제외하면 남녀직원 대부분이 히스패닉계 직원들이었다. 해서, 남미계 직원들에게 스패니시도 열심히 배웠다. 그들
젊었을 때야 나름 모두 아름다웠고 패기가 넘쳤겠지만, 사람이 나이 들어 병들고 연약해지면 타인의 앞에 내 치부를 다 들어내 놓고 돌봄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 날까지 정신 말짱하게 살면서 스스로 먹고 싸고 하다가 품격 있게 가는 일은 모든 노년의 희망 사항일 터. 더하여, 죽음 그 이후의 현실이 천국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누구나가 마찬가지. 누가 지옥에 가고 싶겠는가.성경 말씀이 일점일획도 변함없는 사실이고 보면, 천국과 지옥도 곧 닥치게 될 “현실”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아야 한다. 서글픈 일은, 교회를 몇십 년을 다니고 이
Hospice Care Volunteer 훈련을 받고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Coordinator로부터 연락이 왔고 첫 번째 의뢰인인 Betty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Heaven(천국)이 아닌 Haven(피난처)이라는 Life Center에 가서 가슴에 걸고 있는 신분 확인증을 보여주고 방명록에 만날 사람과 시간 등을 기록하자 굳게 닫힌 철문을 열어 주었다. Betty 할머니는 일반 환자가 아니라 치매 환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만나보니 예쁘고 얌전한 분이셨다. 웬일인지 말씀도 하지 못하신다. 눈에
노인 아파트에서의 성경공부 후에 ㅇㅇ교회로 가서 예배 전 성경공부와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곳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홈리스들에게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손이 모자라니 평일에도 나와서 거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월요일 낮에 나가보니, 그야말로 배고픈 그들에게 밥을 먹이고는 있었는데….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담임 사역자에게 물었다. “Only food? How about their salvation?”(밥만 먹이나요? 저들의 구원은요?) 라고. 저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단 밥을 먹이는 게 아니냐고. 내 질문을 받은
애리조나 소도시의 International Church에 Co-pastor로 부임한 지 6개월이 채 못되어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역하러 갔으나 사역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사역하자고 나를 불러 낸 사람이 나를 견제하고 밀어내자고 작심을 했으니, 아무리 참을성이 많은 나라고 해도 참고 버틸 상황은 아니었다. 전혀 예상 밖의 전개였으나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그 와중에, 정확한 시간에 노인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다달이 받는 SSA 소득이 매우 적었지만, 노인
그렇다. 내가 Fashion Design을 다시 공부한 이유도 결국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확인시키고 나자 새로운 사역을 향해 서서히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내 안에는 늘 엔진이 돌아가고 있다. 일단 방향만 정해지면 달려나가는. 담임인 미국 목사님과 의논을 한 후, 화요일 저녁엔 중보기도 모임을, 금요일에는 성경통독을 해 나가면서 개요와 암송, 말씀과 현실을 비교 분석하는 방법으로 성경공부를, 새벽예배 인도는 나눠서 인도하기로 했다.사역은 어떤 일 보다도 즐겁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역하는 것이 나를 더
그냥 학교만 갔다 오는 게 공부가 아니다. 학교에 가면 당연히 이런저런 숙제들과 각 과목의 프로젝트를 기한 안에 제출해야 한다. 학비만큼, 아니 그 이상의 장비와 실습비가 필요하다. 할인판매를 하는 옷은 싸지만 새 옷감은 저렴하지가 않다. “Joan”에서 학생증이 있는 사람에게 15%를 깎아 준다고 해도 넉넉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그 비용들이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헌 옷을 파는 데 가서 헝겊 분량이 많은 드레스를 사다가 뜯고 빨고 다려서 사용하기도 했다.악착같이 43과목을 마치고 한 과목을 제외한 42과목에 A 학점을 받았다. 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