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최종편집 2024-04-28 10:30 (일)
  • 서울
    Y
    20℃
  • 경기
    Y
    20℃
  • 인천
    Y
    20℃
  • 광주
    Y
    21℃
  • 대전
    Y
    19℃
  • 대구
    Y
    22℃
  • 울산
    Y
    21℃
  • 부산
    Y
    21℃
  • 강원
    B
    20℃
  • 충북
    Y
    19℃
  • 충남
    Y
    20℃
  • 전북
    Y
    22℃
  • 전남
    Y
    20℃
  • 경북
    Y
    22℃
  • 경남
    Y
    21℃
  • 제주
    Y
    20℃
  • 세종
    Y
    19℃

본문영역

[바이블시론] 혀에 관하여

한병수 (전주대 교수·선교신학대학원장)

  • 기사입력 2024.03.15 04:06
  • 최종수정 2024.03.15 07:04
  • 기자명 더미션

야고보는 혀가 ‘치명적인 독이 가득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치명적인 독이 독사나 다른 생물에게 있다고 알지만, 세상의 모든 독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치명적인 독이 우리의 혀에 있다는 사실은 모릅니다. 다른 모든 독은 우리의 몸을 해치지만 혀의 독은 사람의 영혼을 해칩니다. 세상의 무수히 많은 독은 우리의 혀에 가장 심각한 독이 있음을 잊지 말라는 창조주의 배려 같습니다.

혀에 가득한 ‘치명적인 독’에 대해 이사야는 말합니다.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사 59:4) 혀는 법정이나 가정이나 직장을 가리지 않고 치명적인 독을 뿜습니다. 입을 열 때마다 맹독성 거짓이 쏟아지고 타인의 귀를 파고들어 영혼에 치명상을 입힙니다. 야고보의 말처럼 혀를 제어하지 않으면 지구가 지옥의 불이 타오르는 불의의 세계로 변할 것입니다.

혀의 가장 해로운 치명성에 대해 중세의 교부 버나드는 비방의 독이 가득한 혀가 한번에 세 사람을 죽이는데 듣는 자와 비방의 대상만 죽이는 게 아니라 말하는 당사자도 동시에 죽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을 것이라”(마 12:37)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야고보의 진단처럼 이토록 심각한 혀를 ‘사람들 중에 누구도 능히 제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혀를 자르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손이 죄를 범하게 하면 자르고 눈이 죄를 범하게 하면 뽑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수사학을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 것은 과도한 문자적 해석의 폐단을 낳습니다. 창조주의 의도를 따라 만들어진 혀 자르기, 즉 그 고귀한 기물을 훼손하는 것은 창조주의 뜻이 아닙니다.

혀의 용도는 말하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에 시민의 혀에 족쇄를 채우는 것은 사회적인 미덕이 아닙니다. 혀의 자유를 사수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죽음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혀를 제어해야 한다고 말하고 동시에 그 혀는 사람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맥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주장하는 언론의 자유는 타인이나 공권력에 의해 혀가 억압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성경이 말하는 혀의 제어는 혀를 치명적인 악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혀를 제어하지 못한다는 말은 대단히 냉혹한 선언인 듯하지만 희망의 함의도 보입니다. 혀를 길들이는 해결의 실마리는 혀를 제어하는 자가 ‘사람들 중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사람이 아닌 다른 해결자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야보고가 이렇게 말한 건 우리가 이 악을 용인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은총을 하나님께 청하게 하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교부는 순차적인 제어의 질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들짐승을 길들이고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길들이실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차원을 길들이지 못하고 보다 높은 차원의 권위에 의해 길들여질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제어할 사람이 없다는 없음의 절망에서 있음의 희망이 얼마든지 읽힙니다. 이런 믿음의 해석학은 혀를 길들이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모든 절망적인 일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절망이 내는 목소리는 피조물의 차원보다 높으신 창조주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한병수 (전주대 교수·선교신학대학원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기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인기영상